큐레이션이 서점의 브랜드가 되는 시대
예전에는 서점이라 하면 ‘책이 많은 곳’이 곧 좋은 서점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작은 서점들에게 그런 기준은 통하지 않는다. 온라인서점에서는 원하는 책을 빠르게 주문할 수 있고, 대형 프랜차이즈 서점은 물리적 규모로 압도한다. 그렇다면 독립서점, 동네서점은 어떻게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야 할까? 바로 ‘책의 큐레이션’이 핵심이다.
큐레이션이란 단순히 책을 진열하는 것을 넘어, 서점 운영자의 철학과 시선이 반영된 선별의 작업이다. 어떤 책을 고르고, 어떤 순서로 배열하며, 어떤 방식으로 소개할지에 따라 서점의 정체성이 드러난다. 이는 단순한 판매 전략을 넘어, 공간의 분위기와 메시지를 결정짓는 본질적 요소다. 예를 들어 한 서점은 여성 작가의 에세이만을 진열하고, 또 다른 곳은 오래된 클래식 문학만을 판매한다. 이러한 특화된 큐레이션은 특정 고객층의 충성도를 높이고, 서점 자체를 ‘브랜드’로 인식하게 만든다.
실제 독립서점을 자주 찾는 사람들은 단순히 책을 구매하기보다는, ‘그 서점이 추천하는 책’이라는 신뢰감을 갖고 방문한다. 예컨대 “이 서점이 추천했다면 나랑 잘 맞을 것 같아”라는 기대감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큐레이션이 가지는 힘이다. 무수한 책 사이에서 길을 잃는 대신, 누군가의 고민과 경험이 담긴 책 리스트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독자에게 큰 의미로 다가온다.
따라서 큐레이션은 단순히 책을 고르는 기술이 아니라, ‘책을 통해 사람과 소통하는 방식’이다. 이 과정이 쌓이면 서점은 단순한 매장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적 거점으로 진화할 수 있다. 사람들이 이 서점만의 시선과 이야기를 믿고 찾아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작은 서점의 큐레이션 전략, 어떻게 다를까?
작은 서점에게 있어 큐레이션은 생존 전략이자 정체성이다. 한정된 공간과 예산 속에서 모든 책을 다루기엔 현실적인 제약이 많다. 따라서 선택과 집중을 통해 ‘이 서점에서만 만날 수 있는’ 큐레이션을 제공해야 한다. 이때 핵심은 단순히 책을 고르는 것을 넘어, 책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성수동의 한 독립서점은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을 콘셉트로 삼고, 직장인의 일상과 고민에 맞춘 에세이, 인터뷰집, 업무 노하우 도서 등을 선별해 진열한다. 책 옆에는 운영자의 손글씨 리뷰가 함께 놓이고, 때때로 관련 워크숍도 연다. 이처럼 콘텐츠와 경험이 연결되면서 서점은 하나의 ‘작은 커뮤니티’로 기능한다.
작은 서점은 대량의 신간을 들여오기 어렵기 때문에, 한 권의 책을 다양한 방식으로 소개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계절별로 ‘봄에 읽는 책’, ‘휴가철 추천서’처럼 테마를 바꾸고, 같은 책도 여러 맥락 속에서 재조명하는 것이다. 또한 큐레이션 방식에 따라 같은 책이라도 전혀 다르게 보일 수 있다. 똑같은 시집 한 권이라도 ‘사랑이 끝난 날에 읽는 책’이라는 코너에서 소개되면, 감정적으로 더 큰 울림을 줄 수 있다.
지역성과 결합한 큐레이션도 효과적이다. 전주에 있는 한 서점은 전라도 지역 작가의 책만 따로 모아 소개하고, 매달 지역 출신 작가를 초청해 토크 행사를 연다. 이러한 접근은 ‘로컬 브랜딩’으로 이어져 단골 확보에 유리하다. 방문객은 그 지역의 문화를 더 깊이 체험할 수 있고, 서점은 지역 내에서 독립적인 문화 거점으로 자리 잡는다.
이처럼 작은 서점의 큐레이션은 단순한 ‘책 나열’이 아니라, 고객 경험 설계의 일부다. 책을 통해 공간을 이야기하고, 공간을 통해 책을 소개하는 이 방식은 책이라는 매체를 넘어서 독자의 삶에 깊이 들어가는 역할을 하게 된다.
큐레이션의 성패를 가르는 세 가지 핵심 요소
책 큐레이션의 성공 여부는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얼마나 ‘고객의 삶과 연결되었는가’, ‘서점의 철학이 일관되게 유지되는가’, ‘맥락이 살아 있는가’로 결정된다. 이 세 가지 요소는 책을 선별하고 진열하는 모든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
첫째, 공감은 가장 중요하다. 서점 운영자의 취향은 물론 중요하지만, 큐레이션은 결국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담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2030 여성 독자가 많은 지역이라면, 연애, 자기 돌봄, 사회적 독립에 관한 책을 중심으로 큐레이션할 수 있다. 독자는 자신이 놓인 현실을 반영한 큐레이션에 강하게 반응하며, 이는 신뢰로 이어진다. 좋은 큐레이션은 책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감정을 읽는 작업에 가깝다.
둘째, 일관성은 브랜드 정체성의 핵심이다. 오늘은 사회과학, 내일은 아동 도서, 다음 주는 미술서처럼 방향이 오락가락하면 고객은 혼란을 느낀다. 작은 서점일수록 주제에 대한 ‘깊이’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인문학 큐레이션을 중심으로 한다면, 철학·사회학·문학을 다각도로 접근하면서도 흐름을 유지해야 한다. SNS에 올리는 콘텐츠, 책 옆에 붙는 추천 문구, 진열 방식까지 모두 톤앤매너를 통일하는 것이 중요하다.
셋째, 맥락을 어떻게 설계하느냐가 큐레이션의 품질을 좌우한다. 같은 책이라도 어디에, 어떤 콘셉트로 배치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메시지를 줄 수 있다. 예컨대 ‘밤에 읽기 좋은 책’ 코너에 『달까지 가자』가 놓이면 감성적이고 여운 있는 이야기로 다가오지만, ‘요즘 뜨는 작가’ 코너에 놓이면 트렌디한 느낌이 강조된다. 큐레이션은 책 자체보다 그것을 둘러싼 이야기와 맥락을 만들어주는 작업이다.
결국, 큐레이션은 서점 운영자의 ‘세계관’이자 고객과의 ‘대화 방식’이다. 이 작업이 충실할수록 독자는 서점에 감정적으로 연결되고, 단순한 소비를 넘어 ‘공간을 기억하는 경험’으로 서점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이 쌓일수록, 서점은 지역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문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