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은 늘 새롭고, 자유로워 보인다. 좋아하는 것을 표현하고, 내 방식대로 해석하고, 타인과는 다른 목소리를 가질 수 있는 행위. 그래서 처음 창작을 시작했을 땐 설렘과 에너지가 넘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 그 열정은 흔들린다. 뭔가를 해도 재미가 없고, 아무리 시간을 들여도 만족스럽지 않다. 더 이상 손이 움직이지 않고, 떠오르는 아이디어도 없다.
이 시기가 바로 ‘창작의 권태기’다.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시기.
이 글은 창작의 권태기를 겪을 때, 내가 어떻게 버티고, 다시 나를 회복하는지를 공유하고자 한다. 끝내지 않고 버티는 법, 무뎌지는 순간을 지나오는 방식, 그 작은 기술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무것도 만들지 않아도 되는 시기를 받아들이는 연습
창작을 직업이나 꾸준한 활동으로 삼은 사람들에게 가장 어려운 건 ‘아무것도 만들고 싶지 않을 때’이다. 머릿속은 공허하고, 손은 움직이지 않으며, 예전처럼 몰입도 되지 않는다. 그때 우리는 스스로를 채근한다. “왜 이렇게 게을러졌지?”, “예전엔 이 정도는 금방 했는데…”, “이러다 완전히 감각을 잃는 거 아냐?”
이런 자기비판은 권태기를 더 깊게 만든다. 실제로 많은 창작자들이 권태기를 오래 겪는 이유는 ‘창작하지 못하는 나를 받아들이지 못해서’다.
하지만 창작의 권태기는 멈춰있는 상태가 아니라, 속도가 보이지 않는 변화의 시기일 수 있다.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지 않아도, 우리의 감각은 여전히 작동 중이다. 다만 그것이 지금 당장 ‘결과물’로 나오지 않는 것뿐이다. 마치 씨앗이 땅 속에서 천천히 싹을 틔우는 시기처럼, 창작의 권태기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축적과 재정비의 시간이 된다.
이 시기에 내가 가장 자주 스스로에게 하는 말은 “지금은 흘러도 되는 시간이다”이다. 뭔가를 억지로 만들려고 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일단 미룬다. 대신 읽고, 듣고, 느끼는 쪽으로 감각을 돌린다. 영화를 보거나, 좋아했던 책을 다시 펼치거나, 아무 계획 없이 거리를 걷는다.
이런 시간들이 쌓이면서, 어느 순간 ‘다시 하고 싶다’는 욕구가 찾아온다. 중요한 건, 욕구가 자연스럽게 떠오를 수 있는 여백을 주는 것이다.
창작은 강제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특히 감정을 기반으로 하는 창작일수록, 마음이 닫힌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권태기가 찾아왔을 땐, 그 시기를 무조건 피하거나 극복하려고 애쓰기보다 받아들이는 연습이 먼저다. 아무것도 만들지 않아도 괜찮다는 태도는, 결국 다시 만들 수 있는 힘이 된다.
감각을 다시 깨우는 루틴 만들기
권태기에서 가장 흔한 현상은 ‘자극에 무뎌지는 것’이다. 예전엔 책 한 줄에도 울컥했고, 영화 한 장면에 오래 머물렀고, 길가의 풍경 하나에도 무언가 떠오르곤 했다. 그런데 요즘은 아무리 좋은 콘텐츠를 접해도 ‘그냥 그렇다’는 느낌만 든다. 감각이 죽은 것처럼 느껴지고, 그 감각이 돌아올까 두렵기까지 하다.
이때 필요한 건 강한 자극이 아니라, 반복을 통한 감각의 재생이다. 감각은 회로처럼 작동한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흐름이 약해지지만, 다시 조금씩 사용하면 흐름이 돌아온다. 나는 이 시기를 ‘감각의 물꼬를 트는 시간’이라고 부른다. 아무리 작더라도, 감각을 일상에서 다시 꺼내기 위한 루틴을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하는 5분 일기. 그날의 날씨, 몸의 느낌, 어젯밤 꾼 꿈 같은 사소한 것들을 써본다. 처음엔 ‘이게 무슨 의미가 있지?’ 싶지만, 며칠만 지나면 단어 하나, 문장 하나가 ‘나의 감각’으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또는 산책 루틴. 똑같은 길을 걸으면서, 오늘은 어떤 냄새가 나는지, 어떤 소리가 들리는지를 의식적으로 느끼는 것. 이 루틴은 내 감각이 외부 세계와 다시 접속하도록 돕는다.
또 하나의 루틴은 ‘하루 한 문장 베껴 쓰기’다. 좋아하는 책, 시, 산문에서 마음에 드는 문장을 손으로 옮겨 적는다. 이 과정에서 나의 감정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예: “이 문장은 왜 이렇게 아프게 느껴지지?”, “이 말이 오늘의 나랑 닿아 있다.” 이렇게 내 감정과 언어 사이의 접점을 회복하는 것이 창작의 복귀를 이끄는 첫걸음이 된다.
결국 권태기를 지나기 위해서는 감각을 억지로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조용하게 다시 호출하는 루틴을 만드는 것이다. 반복은 감각의 가장 좋은 연료다. 감정이 없을 때도, 영감이 없을 때도, 루틴이 있으면 우리는 감각을 다시 불러낼 수 있다.
창작을 일상과 분리하지 않는 태도
창작의 권태기는 종종 ‘창작은 특별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시작된다. 뭔가 대단한 것을 써야 할 것 같고, 남들과는 다른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고, 감동을 줘야 하고,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압박. 그런데 이런 부담이 쌓일수록, 창작은 점점 더 손에 닿지 않는 일이 된다.
나는 이때 이렇게 생각을 전환한다. 창작은 대단한 일이 아니라, 생활의 한 조각이다. 꼭 멋진 결과물이 아니어도 좋고, 누가 봐줄 일이 아니어도 괜찮다. 그저 내가 내 마음을 잘 들여다보고, 그것을 어떤 형태로든 바깥으로 꺼내는 일. 그것이 창작이라고 다시 정의한다.
예를 들어, 하루 중 가장 창작 같은 순간이 ‘카페에서 마신 커피 맛에 대해 한 줄 남긴 노트’일 때가 있다. “오늘 커피는 지난주보다 쓴맛이 강했다. 아마 마음이 조용해서일지도.” 이런 문장 하나가 나의 감각을 다시 일상과 연결시켜준다. 그리고 이 연결이 창작의 시작점이 된다.
또 하나는 일상에서의 미세한 기록을 창작과 연결짓는 연습이다. 마트에서 본 어떤 풍경, 친구의 한마디, 버스 안에서 본 창밖. 예전엔 흘려보냈던 장면을 잠시 붙잡고 메모하거나, 사진을 찍어두거나, 나중에 다시 떠올려보는 것. 이때 중요한 건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느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해주는 일이다. 감각이 돌아오기 위해선, 느낀 것을 흘려보내지 않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요한 태도는 ‘비교하지 않는 창작’이다. 타인의 결과물은 언제나 완성되어 있고, 반응을 얻고 있고, 멋져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면의 권태와 반복, 수많은 실패를 보지 못한다. 비교는 권태를 더 깊게 만들고, 창작을 멈추게 만든다. 나의 속도, 나의 감정, 나의 문장을 중심에 두는 일. 그게 권태기를 지나 창작을 다시 품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