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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주의가 좋아하는 일을 망치는 방식

by memo7919 2025. 5. 15.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기준이 높아진다.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보자’, ‘좋아하니까 더 잘하고 싶다’, ‘내가 만족할 때까지 다듬어야지.’
이런 마음은 창작자나 프리랜서, 자기 일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하지만 이 마음이 지나치면, 곧 완벽주의가 된다.
완벽주의는 열정의 탈을 쓰고 우리를 소진시키는 감정이다.
이 글은 어떻게 완벽주의가 좋아하는 일을 망치게 되는지, 그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잃고 있는지, 그리고 그 완벽의 집착에서 어떻게 나를 구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완벽주의가 좋아하는 일을 망치는 방식

 

시작조차 어렵게 만드는 ‘기준 중독’


완벽주의가 만드는 가장 첫 번째 문제는 시작을 막는 것이다.
완벽하게 하고 싶다는 욕망은 필연적으로 ‘완벽한 조건’을 찾게 만들고, 그 조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시작을 미룬다.
예를 들어, 글을 쓰기 위해 자료조사를 끝까지 해야 하고, 머릿속에서 구조가 명확해야 하며, 문장 하나하나가 단정하게 정리돼야 마음이 놓인다.
그렇지 않으면 아예 손도 대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처음엔 철저함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두려움의 다른 얼굴이다.
‘이대로 시작해서 실패하면 어쩌지?’, ‘이걸로 내 실력이 드러나는 게 무섭다’, ‘결과가 부족하면 스스로가 실망스러울 것 같아.’
완벽주의는 사실상 ‘불완전한 나’에 대한 공포를 기준이라는 껍데기로 감추는 방식이다.

결국 완벽주의는 시작을 영영 유예시키는 습관이 된다.
준비는 계속되는데, 실천은 없다.
이 시기가 길어질수록 우리는 자책하고, 자책은 다시 더 강한 기준으로 이어진다.
그 악순환 속에서 좋아하던 감정은 점점 사라진다.
이제 일은 즐거움이 아니라, 통과하기 어려운 시험이 되어버린다.

이 흐름을 끊기 위해선 기준을 내려야 한다.
처음부터 100점을 기대하지 말고, 초안의 상태로 세상에 내보내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다.
그림 한 장이든, 글 한 줄이든, 영상 몇 초든, 미완의 상태로 일단 시작하는 경험이 반복되면 완벽하지 않아도 나를 지킬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다.
기준은 나중에 다듬어도 된다.
지금 필요한 건, 기준보다 시작이다.

 

반복이 아닌 과잉 수정으로 감각을 망가뜨릴 때


완벽주의의 또 다른 문제는 반복 대신 과잉 수정으로 흐름을 무너뜨린다는 점이다.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하려면, 반복이 필요하다.
글을 꾸준히 써야 하고, 그림을 계속 그려야 하며, 같은 동작을 여러 번 해봐야 내 것이 된다.
하지만 완벽주의자들은 반복보다 수정에 집착한다.
하나의 결과물을 끊임없이 고치고, 다듬고, 다시 보고, 다시 뜯는다.
그러는 사이, ‘계속 쌓아야 할 경험’은 하나의 작업에 갇힌 채 멈춰버린다.

물론 다듬는 건 중요하다.
하지만 그 과정이 ‘다음 작업으로 넘어가는 시간’을 늦춘다면, 그것은 발전이 아니다.
작업 하나를 끝내고 다음으로 나아가는 것, 그걸 반복하면서 나의 감각과 손의 흐름이 살아난다.
완벽주의는 이 흐름을 끊는다.
완성도가 아니라 ‘컨트롤’에 중독되게 만들고, 어느 시점엔 나조차도 만족하지 못하는 작업만 남는다.

게다가 과잉 수정은 감각을 무디게 만든다.
처음의 날것 감정, 순간적인 몰입, 직관적인 판단은 수정이 반복될수록 흐려진다.
결국 완벽주의는 나의 ‘가장 생생한 감각’을 죽이게 된다.
좋아하는 일이 점점 메마르고, 형식만 남은 기계적인 작업으로 변질된다.

이 흐름을 멈추려면 ‘한 번의 완벽’보다 ‘열 번의 자연스러움’을 선택해야 한다.
30점짜리 작업을 열 번 해보는 것, 70점짜리 글을 매일 쓰는 것, 그리고 매번 다른 나를 기록해보는 것.
이 반복이 감각을 살리고, 실력을 올리고, 나를 덜 소모시킨다.
완벽은 하나의 결과를 만든다. 반복은 나를 만든다.
우리는 후자를 선택해야 한다.

 

완성도가 높을수록 자기 감정을 잃어버리는 모순


완벽주의자들이 가장 자주 빠지는 아이러니는 ‘완성도는 높은데, 마음은 멀어지는’ 현상이다.
그럴싸한 글, 반응이 좋은 디자인, 논리적인 기획서를 완성했는데도 만족감이 없다.
왜일까?
그 이유는 분명하다.
감정이 들어갈 틈 없이, 모든 걸 통제하려 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일은 감정을 전제로 한다.
이 일은 왜 나에게 중요했는지, 이 작업을 하며 내가 어떤 마음을 담았는지, 어떤 흔들림이 있었고, 어떤 지점에서 멈칫했는지를 인식하고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완벽주의는 모든 것을 ‘정리된 문장’으로 바꾸려 한다.
날카로운 문장은 남지만, 따뜻한 감정은 지워진다.

이렇게 되면 결국 우리는 결과물은 좋지만, 감정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작업들을 양산하게 된다.
그 작업은 외부에선 인정받을 수 있다.
하지만 내 안에선 뿌리 내리지 못한다.
그리고 그 반복은, 좋아했던 감정마저 흐리게 만든다.

이 실수를 피하려면 작업을 하는 도중에도 자주 감정의 위치를 확인해야 한다.
“나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이걸 하고 있지?”,
“내가 이 일에 들인 감정은 어떤 색이었지?”,
“이 감정이 결과물에 잘 담기고 있나?”
이 질문들은 작업과 감정의 접점을 유지하게 해준다.

완벽주의는 결국, 내 감정을 버리고 결과만 챙기는 태도다.
그 태도가 쌓이면 좋아하는 일도 결국 타인의 기준으로 채워진다.
완성도는 높지만, 그 안에 내가 없다면, 그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하고 싶다면,
‘잘 만든 일’보다 ‘나와 연결된 일’을 선택해야 한다.
완벽보다 진심, 계산보다 감정.
그 기준이 우리를 다시 좋아하는 일과 연결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