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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와 에세이 사이, 아무도 보지 않는 글에서 문장을 발견하는 순간

by memo7919 2025. 5. 16.

대부분의 사람은 누군가가 읽을 것을 전제로 글을 쓴다. SNS에 올리는 짧은 문장, 블로그의 일상 기록, 출판을 위한 원고까지. ‘읽히는 글’은 자연스럽게 대상이 외부로 향한다. 하지만 그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있다. 바로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글, 즉 일기다. 이 글은 평가받지 않고, 비교되지 않고, 다듬어지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종종 놀라운 문장을 발견한다. 어쩌면 가장 깊은 감정, 가장 진심 어린 고백, 가장 덜 꾸며진 말은 ‘보여줄 생각이 없었던 글’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이 글은 일기와 에세이 사이, 즉 나만을 위한 글쓰기 속에서 문장을 발견하는 경험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무도 보지 않기에 가능한 솔직함, 숨기지 않아도 되는 감정, 거기서 피어나는 진짜 문장들에 대하여.

일기와 에세이 사이, 아무도 보지 않는 글에서 문장을 발견하는 순간

 

기록이라는 이름의 감정 실험실


일기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쓰는 글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안에서 감정을 있는 그대로 꺼낸다. 억제하지 않고, 검열하지 않고, 정리하지도 않는다. 그 순간 가장 앞선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어떤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는지, 어떤 어투로 말하고 싶었는지를 솔직하게 쏟아낸다. 이 ‘가공되지 않은 감정’은 글쓰기에서 아주 중요한 자원이다. 왜냐하면 감정이 생생할수록, 그 감정을 담은 문장은 독자의 마음에 직접 닿기 때문이다.

일기는 감정의 실험실이다. 어떤 감정이 내 안에 남아 있는지, 어떤 말이 나를 괴롭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예를 들어 "오늘은 그냥 다 귀찮다"라는 한 줄조차, 외부용 글에서는 쉽게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일기에서는 그런 문장이 가장 먼저 등장한다. 이런 문장은 때로는 날 것 그대로의 언어로, 때로는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형식에 맞지 않지만, 바로 그것이 문장의 시작점이 된다.

나는 에세이를 쓸 때 문장이 막히면, 최근에 쓴 일기를 다시 꺼내본다. 거기엔 당장 사용하지는 못해도 나만의 언어가 가득하다. ‘그때 내가 어떤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했는지’, ‘그 문장 속에 감정이 얼마나 고스란히 남아 있는지’를 확인하다 보면, 에세이에서 써야 할 문장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결국 일기와 에세이의 경계는 흐릿하다. 다만 일기는 마음의 중심에서 쓰는 글이고, 에세이는 그것을 꺼내 외부와 공유할 수 있도록 다듬는 글일 뿐이다. 그 출발선이 되는 일기를 진심으로 써야, 에세이도 진짜 감정을 담을 수 있다.

 

독자를 지우는 순간, 진짜 언어가 나온다


에세이를 쓸 때 우리는 늘 ‘누가 이 글을 읽을까’를 염두에 둔다. 독자를 의식하게 되면 문장의 어조가 달라지고, 감정의 표현 방식도 정제된다. 물론 이것은 글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지만, 동시에 우리 안의 ‘날것의 감정’은 필터링되어 사라진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글쓰기 훈련은 ‘독자를 지우는 것’이다. 누가 볼지 신경 쓰지 않고, 오직 나만을 위한 글을 쓰는 연습. 즉, 일기의 문장들이다.

독자를 의식하지 않을 때, 우리는 훨씬 더 단도직입적인 언어를 쓴다. “진짜 화났다”, “이 말은 입 밖으로는 못 꺼내겠지만…” 이런 말들이 시작이 되고, 그 감정 위에 문장이 얹히기 시작한다. 독자를 지운 상태에서 쓰는 글은 표현의 제약이 없다. 글의 목적도 없어지고, 서사도 사라진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무목적성 속에서 가장 강한 문장이 튀어나온다.

이렇게 ‘무방비 상태의 문장’을 계속 써보다 보면, 자신이 쓰는 언어의 습관과 감정의 패턴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 이게 내 진짜 말이구나” 하는 자각이 온다. 그 자각은 에세이를 쓸 때 가장 큰 무기가 된다. 사람들은 감정에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에 공감한다. 진심은 독자를 의식한 글이 아니라, 독자를 지우고 쓴 글에서 태어난다.

이런 글은 글쓰기 초보자에게도, 오랜 작가에게도 똑같이 유효하다. 완성도 높은 글을 위한 첫걸음은 ‘완성도를 신경 쓰지 않는 연습’이다. 그 연습을 위해 우리는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글, 그곳에서 문장을 건져야 한다. 진짜 언어는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자란다. 우리가 그 말에 조금만 더 귀를 기울이면, 일상 어디서든 강한 문장을 건져낼 수 있다.

 

무용한 문장에서 가장 필요한 문장이 태어난다


일기에는 종종 ‘쓸모없어 보이는 문장’이 가득하다. 너무 사소하거나, 감정적이거나, 앞뒤가 맞지 않거나. 그래서 우리는 그런 글을 별 의미 없이 지나치곤 한다. 하지만 글쓰기의 경험이 쌓일수록 알게 된다. 그 무용한 문장들이 결국 내 문장의 바탕이 되어준다는 걸. 글에서 가장 중요한 건 항상 ‘쓰기의 흐름’이다. 좋은 문장은 우연히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무용한 문장들을 지나가며 나타난다. 그리고 그 무용한 문장을 가장 많이 담고 있는 곳이 바로 ‘아무도 보지 않는 글’, 즉 일기다.

에세이를 쓸 때 많은 사람들이 처음부터 의미 있는 문장을 쓰려고 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완성된 문장은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대화에서 처음부터 결론을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수많은 말을 하다, 어느 순간 핵심을 말하게 된다. 글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감정과 문장을 흘려보내야, 그중에서 하나의 진심이 문장으로 남는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쓸모없는 글’을 더 많이 써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쓰고 나서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는 글, 다른 사람에게는 보여주기 민망한 문장들. 그 속에서 쓰는 사람의 감정이 정리되고, 언어가 정리되고, 무엇보다 ‘글을 쓰는 감각’이 유지된다. 그리고 그 감각이 사라지지 않을 때, 정말 써야 할 문장이 나오는 것이다.

일기와 에세이 사이에는 경계가 없다. 오히려 ‘보여줄 수 없었던 글’이 보여줄 수 있는 글의 뿌리가 된다. 아무도 보지 않는 글에서 건져낸 문장이 결국 많은 사람의 마음에 닿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문장은, 애초에 평가받기 위해 쓰인 문장이 아니었기에 더 진실하다. 결국 좋은 문장은 목적 없이 쓴 문장에서 나온다. 아무도 보지 않는 글 속에 숨겨진 그 단어 하나, 그 문장 하나가 결국 가장 오래 남는 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