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대개 강한 감정이 있을 때 글을 쓴다. 화가 나거나, 감동을 받거나,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욕구가 생겼을 때 자연스럽게 문장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런 날은 그리 자주 오지 않는다. 글쓰기를 일상화한 사람이라면 오히려 ‘감정이 없는 날’이 더 많다. 무기력하고, 심심하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 날. 그럴 때 우리는 “오늘은 쓸 게 없다”며 노트북을 닫아버리곤 한다. 그러나 이 무미건조함 속에도 ‘진짜 말’이 숨어 있다. 단지 그 말을 끌어올리는 기술이 필요할 뿐이다. 이 글은 감정이 없다고 느끼는 날에도 기록을 지속할 수 있는 방법, 그리고 그 상태에서 오히려 더 진실한 문장을 발견하는 과정을 다룬다.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감정이 없다는 말은 사실 틀렸다. 인간은 언제나 무언가를 느끼고 있다. 다만 그 감정이 뚜렷하지 않거나, 익숙해서 더 이상 인식되지 않을 뿐이다. 마치 배경 소음처럼 존재하지만,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감정들. 무기력, 권태, 무관심, 애매한 불편함. 이런 감정들은 분노나 슬픔처럼 강하지 않지만, 오히려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감정이다. 그래서 이 감정을 인식하고 언어로 붙잡는 훈련이 중요하다.
그 첫걸음은 ‘감정 없는 상태를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오늘은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어제와 똑같은 하루였다”, “모든 게 그저 흘러가는 느낌이다.” 이런 문장은 특별하지 않지만, 그 안에는 ‘지금 나의 상태’가 있다. 이 상태를 받아들이고 기록하는 것이 진짜 글쓰기의 시작이다. 우리는 자주 ‘특별한 감정’만이 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짜 말은 자주 느끼는 익숙한 감정 속에 있다.
또한 ‘지금 느껴지지 않는 감정’이 아니라 ‘지금까지 사라진 감정’을 추적해보는 것도 방법이다. “요즘은 왜 설레지 않을까?”, “예전엔 글쓸 때 두근거림이 있었는데…” 이런 문장은 지금의 무감각을 거울처럼 비춰준다. 감정을 꺼내는 건 강렬한 체험이 아니라, 작은 질문일 때가 많다. 그 질문 하나로도 충분히 글이 시작될 수 있다.
무미건조한 날을 묘사하는 감각 훈련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날, 우리는 종종 ‘쓸모없는 하루’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날일수록 오히려 감각은 예민해질 수 있다. 감정이 조용해지면 감각이 앞에 나선다. 평소엔 스쳐 지나갔던 소리, 색, 공기, 움직임이 더 또렷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이 감각들은 문장을 만드는 가장 좋은 재료가 된다.
나는 감정이 없는 날엔 ‘묘사 글쓰기’를 한다. 감정을 쓰려고 애쓰지 않고, 단지 눈앞에 있는 것들을 묘사한다. 예를 들어 “오늘 창밖의 나뭇잎은 조금 더 연한 녹색이었다”, “커피잔에서 올라오는 김이 유난히 길었다”, “노트북의 타자 소리가 평소보다 크게 들렸다.” 이런 묘사들은 단지 대상을 기록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내 상태를 반영하는 언어다. 우리가 주목하는 사물은 지금 내 상태와 가장 가까운 감정을 닮아 있다.
묘사를 하다 보면 문장이 점점 길어진다. 처음에는 단어 몇 개로 시작되지만, 곧 그 사물에 대한 생각, 그와 관련된 기억, 지금의 내 기분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렇게 감정 없는 하루가 감각의 하루로 바뀌고, 그 감각은 문장으로 흐른다. 감정이 없다는 건 사실상 ‘느낌의 중심’이 감정에서 감각으로 이동했다는 뜻이다. 그걸 놓치지 않으면, 무미건조한 날도 훌륭한 글감이 된다.
의미 없이 쓰는 글이 결국 진짜 글이 된다
글을 쓸 때 우리는 너무 자주 ‘의미’를 찾으려 한다. “이건 무슨 이야기지?”, “이게 누구에게 도움이 될까?”, “왜 이걸 써야 하지?” 하지만 감정이 없는 날에는 그런 질문이 오히려 글쓰기를 방해한다. 그럴 땐 의미를 찾기보다 그냥 ‘흐르게 두는 것’이 필요하다. 아무 목적 없이 쓰는 글, 아무 계획 없는 문장, 말이 되지 않는 단어들의 나열. 처음에는 무의미해 보이지만, 그 글들은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 쌓여 있던 무언가를 끌어낸다.
나는 글이 막힐 때마다 ‘쓰레기 문장 노트’를 쓴다. 그날 머릿속에 있는 말들을 아무 정리 없이 쏟아낸다. “오늘은 그냥 멍하다”, “이건 말이 안 되지만 그냥 써본다”, “이 단어가 왜 자꾸 생각나지?” 이런 문장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쓰다 보면 점점 말이 풀리고, 문장이 살아난다. 그중 하나는 어느 순간, 에세이의 첫 문장이 된다. 무의미한 글이 진짜 글이 되는 순간이다.
중요한 건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말’을 꺼내는 것이다. 감정이 없다고 해서 글이 무의미한 건 아니다. 오히려 강한 감정이 없기에, 글은 더 담백해지고 진짜 말에 가까워진다. 우리는 흔히 감정이 차오른 날의 글을 더 좋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글은 에너지가 있다. 하지만 감정이 빠진 글은 깊이가 있다. 무미건조한 문장은 조용히 읽는 이의 마음에 남는다. 왜냐하면 그 문장은 포장되지 않았고, 정리되지 않았으며, 그래서 진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