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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같은 길을 걷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이 있다

by memo7919 2025. 5. 22.

매일 똑같은 길을 걷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아침마다 같은 시간, 같은 코스를 지나고, 눈에 익은 건물과 익숙한 소리, 반복되는 풍경 속에서 하루를 연다. 많은 사람들은 그 반복을 지루하다고 느끼고, 새로운 자극이 없으면 창작도 어렵다고 말한다. 하지만 글을 오래 써본 사람은 안다. 오히려 ‘반복된 길’에서 나오는 문장이 더 정교하고, 감정의 결이 더 깊다는 것을. 새로움은 발견의 문제지만, 깊이는 머무름에서 비롯된다. 이 글은 매일 같은 길을 걷는다는 행위가 어떻게 글쓰기의 감각을 키우는지, 그 루틴이 어떻게 특별한 문장을 낳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창작자에게 반복은 정체가 아니라, 감각을 세밀하게 만드는 도구다.

매일 같은 길을 걷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이 있다

풍경이 아니라 감정이 바뀌는 산책의 구조


같은 길을 걸어도, 매일의 기분은 다르다. 하늘의 색이 달라지고, 바람의 온도가 다르고, 나의 상태도 달라진다. 그 길은 변하지 않지만, 내가 느끼는 감각은 매일 다르게 반응한다. 어떤 날은 그늘 아래 오래 머물고 싶고, 어떤 날은 빠르게 지나치고 싶다. 때로는 괜히 눈물이 날 것 같고, 또 어떤 날은 괜히 웃음이 난다. 결국 같은 길을 걸으면서도 새로운 감정을 느끼게 되는 건, 그날의 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일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기 감정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게 된다. 어제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가게 간판이 오늘은 유독 눈에 밟히고, 지나가는 사람의 표정에서 자신을 보기도 한다. 반복되는 길 위에서 익숙한 것들이 감정을 비추는 거울이 되기 시작한다. 이 감정의 기록이 문장의 시작이다.

나는 매일 같은 공원 길을 걷는다. 큰 변화가 없는 풍경이다. 하지만 걷는 날의 마음 상태가 다르기에 그 길이 나에게 전하는 언어도 다르다. 어떤 날은 “이 나무는 왜 이렇게 조용하지”라는 생각이 들고, 또 어떤 날은 “이 길은 어제보다 넓어 보인다”는 문장이 떠오른다. 풍경이 변한 게 아니라, 내가 변한 것이다. 감정을 비추는 고요한 캔버스처럼, 반복되는 길은 나의 마음을 드러내는 가장 좋은 배경이 된다.

 

반복 속에서 세밀해지는 관찰 감각


창작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감각은 ‘관찰력’이다. 그리고 관찰은 멀리서 얻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서 길러진다. 매일 걷는 길은 처음엔 지루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매번 달라지는 미세한 변화들이 숨어 있다. 나뭇잎의 흔들림, 전봇대의 그림자 위치, 상점 간판의 색바램, 아스팔트 위 작은 균열. 이런 사소한 변화들은 새로운 자극보다 더 중요한 ‘변화에 반응하는 감각’을 키워준다.

같은 길을 반복해서 걷는 사람은 이 작은 변화에 민감해진다. 오늘 바람이 평소보다 더 따뜻하게 느껴졌는지, 햇빛이 건물 외벽에 비치는 각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아침마다 마주치는 개가 오늘은 왜 보이지 않는지. 이런 디테일은 일상 속에서 감각을 열어두지 않으면 결코 느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감각이 문장의 깊이를 만든다.

나는 산책을 하면서 메모를 자주 한다. 처음엔 “별일 없네”라고 적던 노트가, 점점 “오늘은 벚꽃이 하나 더 폈다”, “저 고양이는 어제와 다른 골목에서 누워 있다”, “습기가 많은 공기가 목에 먼저 닿는다”는 문장으로 채워진다. 이런 문장은 에세이의 큰 주제가 아니어도, 그 자체로 감각의 밀도를 보여준다. 반복은 관찰을 정교하게 만든다. 자극은 흘러가지만, 관찰은 쌓인다. 그 차이가 글을 만든다.

 

루틴에서 나만의 언어를 찾는 사람들


같은 길을 걷는다는 건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하나의 의식이다. 반복된 루틴 안에서 감정과 감각을 꺼내는 행위는, 결국 나만의 언어를 만드는 과정이기도 하다. 매일 같은 것을 경험하면서도 전혀 다른 말로 풀어낼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창작자에게 필요한 기술이다. 반복은 진부한 것이 아니라, 문장의 뿌리를 깊게 내리게 만든다.

이 루틴을 통해 우리는 ‘자기 언어’를 만들 수 있다. 어떤 풍경을 어떤 단어로 기억하는지, 어떤 감정을 어떤 문장으로 풀어내는지, 그것은 오직 나만이 경험한 루틴을 통해 만들어진다. 나에게는 “노란 플라타너스 그림자”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그것은 내가 매일 아침 그 나무 아래를 지나며 느낀 감정이 오랜 시간 내 언어로 축적된 결과다. 누군가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단어일 수 있지만, 내게는 하나의 감정 구조다. 이런 표현이 많아질수록 글은 더 ‘나다운’ 색을 가진다.

루틴은 창작의 반복이 아니라, ‘감정의 훈련장’이다. 매일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은 감정의 패턴을 읽을 줄 알고, 언어의 리듬을 만들 줄 안다. 이 반복 속에서 삶은 단단해지고, 문장은 더 자기다워진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매일 같은 길을 걷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이 있다고. 그것은 자극에서 나온 문장이 아니라, 축적에서 만들어진 문장이다. 반복은 글의 바닥을 다지는 일이다. 가장 단단하고 조용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