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꾸준히 하는 사람은 어느 순간, 문장 속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는 걸 발견한다. 그것은 특별히 의식한 적도 없고, 일부러 반복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그 단어가 거의 모든 글에서 반복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어떤 사람에겐 ‘고요’일 수 있고, 누군가에겐 ‘그리움’, 혹은 ‘두려움’일 수도 있다. 이렇게 반복해서 등장하는 단어는 단순한 어휘가 아니라, 그 사람 삶의 구조를 드러내는 ‘주제어’다. 이 글은 꾸준한 기록이 어떻게 나만의 주제어를 찾아내고, 그 주제어가 어떻게 글과 삶을 연결하는 중심이 되는지를 이야기한다. ‘나는 어떤 이야기를 반복해서 쓰는 사람인가’를 묻는 일, 그 질문은 글쓰기를 넘어서 자기 자신을 탐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기록의 반복 속에서 단어는 삶의 중심을 드러낸다
기록을 하다 보면 종종 ‘비슷한 이야기를 계속 쓰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매번 새로운 문장을 쓰려고 해도, 돌아보면 같은 감정, 같은 주제를 맴돌고 있다. 처음에는 그것이 한계처럼 느껴진다. ‘왜 나는 똑같은 이야기에 머물러 있을까’, ‘새로운 이야기를 써야 더 성장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하지만 오히려 반복되는 단어 속에 삶의 본질이 숨어 있다.
우리가 자주 쓰는 단어는 단순히 좋아하는 말이 아니라, 무의식이 선택한 감정의 조각이다. 그것은 자신도 모르게 삶을 바라보는 방식, 관계를 맺는 자세, 세상을 해석하는 언어다. 반복은 무심함이 아니라 진심이다. 오랜 시간 쓴 글을 모아보면, 특정 단어가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처음에는 의미 없이 쓴 줄 알았지만, 나중에는 그 단어가 나를 설명해주는 키워드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거리’라는 단어를 자주 쓴다. 물리적인 거리뿐 아니라, 감정적 거리, 사람과의 거리, 나 자신과의 거리. 한동안은 왜 이 단어에 집착하는지 몰랐다. 그런데 글을 되짚어보며 깨달았다. 나는 늘 관계 안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사는 사람이라는 걸. 가까워지기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거리를 만들려는 마음이 있었다. 이 단어는 내가 나를 이해하는 창이 되었고, 그 이후부터 글을 쓸 때 의식적으로 ‘거리에 대한 태도’를 고민하게 됐다. 주제어는 그렇게 발견된다. 기록이 쌓여야만, 무의식이 말을 걸기 시작한다.
주제어는 ‘글의 색’이자 ‘나의 언어’다
글을 읽는 사람들이 “당신의 글은 이런 느낌이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대부분 주제어에서 비롯된다. 어떤 글은 읽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어떤 글은 왠지 고독하고, 또 어떤 글은 뜨거운 생명력을 전한다. 그건 단순한 문체의 문제가 아니라, 반복되는 주제와 감정, 그리고 그 주제를 대표하는 단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제어는 글의 색을 결정한다.
주제어는 문장 안에 숨은 감정의 결이다. 독자는 그것을 단어보다 먼저 감지한다. 말로 표현하지 못해도 ‘이 글은 자꾸 혼자라는 말을 한다’, ‘이 사람은 늘 끝에 조용함이 남는다’고 느낀다. 그리고 이런 느낌은 무작위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주제어는 기록의 축적에서 나온다. 자주 쓰는 말이 감정을 정리하고, 감정이 글의 구조가 되며, 구조가 결국 스타일을 만든다. 그렇게 만들어진 주제어는 나의 언어가 된다.
나는 어떤 글을 써도 ‘고요’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는다. 다루는 주제가 무엇이든, 문장 속에 반드시 그 단어가 스며든다. 예를 들어 슬픔에 대해 쓸 때도, 희망에 대해 쓸 때도, 마지막엔 “그래도 나는 이 고요를 지키고 싶다”는 문장이 들어간다. 그건 내 글의 색이고, 내가 삶을 해석하는 방식이다. 주제어는 이처럼 글을 통일시켜주고, 동시에 나만의 언어를 만들어준다. 반복은 습관이 아니라 정체성이다. 그 정체성은 오래 쌓은 기록 속에서만 나타난다.
주제어를 발견한 뒤의 글쓰기는 방향이 달라진다
주제어를 발견하는 순간, 글쓰기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탐색이 된다. 단어 하나에 집중하며 삶을 다시 읽게 되고, 같은 이야기를 전혀 다른 시선으로 다시 꺼낼 수 있다. 그 단어가 왜 자주 등장했는지,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는지, 그 말을 쓸 때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탐구하는 과정은 곧 자기 이해의 과정이기도 하다. 주제어는 삶의 요약이며, 글쓰기의 뿌리다.
주제어를 알게 되면 글을 쓸 때 혼란이 줄어든다. 무엇을 써야 할지 막막할 때, 그 단어를 중심에 두고 글을 시작할 수 있다. “요즘 내 ‘고요’는 어떤 상태인가?”, “최근 내가 느낀 ‘거리’는 어떤 모습이었나?”, “내 안의 ‘불안’은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 이런 질문은 글의 소재가 아니라, 방향을 정해준다. 방향이 명확하면 글쓰기는 훨씬 덜 소모적이다. 감정을 정리하려는 글이 아니라, 이미 정리된 언어로 감정을 돌려보는 일이 된다.
주제어는 또한 읽는 사람과의 연결을 깊게 만들어준다. 나의 글을 읽는 사람들이 그 단어에 익숙해지면, 그 단어만으로도 나를 떠올리게 된다. 글이 기억되는 게 아니라, 감정이 기억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 감정은 반복되는 언어 속에서 강화된다. 그래서 창작자는 언어를 통해 자신을 남긴다. 주제어는 그 사람의 서사다. 한 단어가 하나의 삶을 설명할 수 있게 되는 순간, 글은 더 이상 단편적인 기록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