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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함을 피하지 않고 붙잡는 법: 글감이 되는 ‘지루한 순간들’

by memo7919 2025. 5. 29.

“오늘은 너무 지루했다.”
이 문장은 우리 일기장에 자주 등장하지만, 정작 글로는 잘 이어지지 않는다. 지루함은 감정이 아닌 상태처럼 느껴지고, 그 상태에선 아무런 글감도 떠오르지 않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작의 관점에서 보면, 지루함은 매우 특별한 신호다. 감정의 밀도가 낮아지고 자극이 사라진 시점. 바로 그때 무의식에 있던 감정이 떠오르고, 사소한 장면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된다. 지루함은 글쓰기에서 피해야 할 감정이 아니라, 붙잡아야 할 상태다. 이 글은 ‘지루한 순간들’을 어떻게 글감으로 바꿀 수 있는지, 그 시간을 견디는 기술과 그 안에 숨은 이야기를 끌어내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바쁘고 복잡한 시대일수록 지루함은 문장을 위한 휴식처다.

지루함을 피하지 않고 붙잡는 법: 글감이 되는 ‘지루한 순간들’

지루함은 감정의 공백이 아니라 창작의 여백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루함을 무의미한 상태로 여긴다. “시간이 안 간다”, “할 일이 없다”, “아무 감정도 없다”는 말은 부정적인 상태를 표현할 때 쓰인다. 하지만 지루함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순히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의식하지 않고 있는 상태’다. 일상이 반복되고, 자극이 줄어들며,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 때 우리 뇌는 일종의 느슨한 모드로 들어간다. 그 순간이 바로 글쓰기에 가장 적합한 순간이다.

왜냐하면 창작은 자극보다는 감각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강한 감정이 있으면 오히려 글을 정리하기 어렵다. 너무 뜨거운 감정은 흩어지기 쉽고, 문장은 흐름을 잃는다. 반면 지루한 시간에는 감정이 천천히 부상하고, 기억은 조용히 떠오른다. 나는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 오히려 일부러 지루한 환경을 만든다. 스마트폰을 멀리하고, 음악도 끄고, 창밖을 오래 바라본다. 처음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지만, 20분쯤 지나면 기억의 잔상이 하나둘 떠오른다. 바로 그 잔상이 문장의 재료다.

지루함은 감정이 쉬고 있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감정이 준비되고 있는 상태다. 그 상태를 견디고 관찰하면, 사소한 생각들이 하나둘 걸려들기 시작한다. 예전 친구가 떠오르기도 하고, 오래된 후회가 말없이 지나가기도 한다. 그건 평소엔 너무 바빠서 떠올릴 수 없었던 것들이다. 지루함은 그런 것들을 꺼낼 수 있게 해주는 문장 앞의 ‘정적’이다.

 

지루한 장면을 묘사하는 기술: 멈춘 시간에 의미 붙이기


우리가 일상에서 지루함을 느끼는 순간은 대부분 반복되는 상황에서 나온다. 출근길 버스 안, 점심 먹고 난 오후의 멍한 시간, 특별한 일 없이 흘러가는 주말 오후. 이때 공통적으로 느끼는 건 ‘무의미함’이다. 그런데 그 무의미함 속에 작은 묘사의 힌트들이 숨어 있다. 단지 그 순간을 ‘지루하다’고 넘겨버리지 않고, 구체적으로 묘사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나는 글쓰기 워크숍에서 자주 이런 과제를 낸다. “최근 가장 지루했던 하루를 3문단으로 묘사해보세요.” 많은 참가자들이 처음에는 쓸 게 없다고 느낀다. 그런데 막상 써보면 그 안에 은근한 감정, 사소한 디테일, 반복되는 풍경이 꽤 많이 들어 있다. 예: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 엘리베이터 숫자가 유난히 느리게 올라갔다. 그 20초 동안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그게 오히려 편안했다.” 이런 문장은 지루한 순간에서만 나올 수 있는 문장이다.

묘사라는 건 결국 ‘그 순간을 얼마나 천천히 들여다봤는가’의 싸움이다. 지루한 장면은 빨리 넘기고 싶은 장면이지만, 거기에서 멈춰서면 새로운 감각들이 튀어나온다. 냄새, 온도, 공기의 밀도, 시간의 속도. 이런 요소들을 붙잡아 문장으로 옮기면, 지루했던 순간이 감정의 장면이 된다. 창작은 특별한 경험보다, 특별하게 바라보는 시선에서 시작된다. 지루함은 그 시선을 훈련할 수 있는 최적의 무대다.

 

지루함 속에서 발견하는 진짜 질문들


지루한 시간은 대부분 질문 없이 흘러간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간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면, 평소에 하지 않던 생각들이 얼굴을 내민다. “왜 요즘은 친구들 연락을 잘 안 하게 되었을까?”, “왜 아침에 일어날 때 피곤한 걸까?”, “요즘 자주 떠오르는 생각은 뭘까?” 이런 질문들은 감정이 비워진 상태에서 해야 더 진심으로 대답할 수 있다. 지루함은 질문의 컨디션을 만든다.

나는 글쓰기 루틴 중 하나로 ‘지루한 날의 질문 쓰기’를 한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 딱 세 가지 질문을 적고 그에 대한 짧은 답을 쓴다. 그 답은 완성된 문장이 아니라 메모에 가까운데, 시간이 지나 그 메모가 하나의 에세이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왜 요즘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을까?”라는 질문에 “뭔가 써도 무의미하게 느껴진다”라고 적었는데, 그 감정이 나중에 ‘창작의 무기력에 대해’라는 글이 되었다. 질문이 감정을 호출한 것이다.

지루함은 감정의 흐름이 막힌 상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막힌 흐름에 질문이라는 도구를 던지면, 다시 길이 열린다. 중요한 건 정답이 아니라 ‘지금 떠오르는 감정의 조각’을 언어로 붙잡는 일이다. 질문은 그 조각을 꺼내주는 도구고, 지루함은 그 조각이 잠들어 있는 상태다. 그래서 둘은 가장 잘 맞는다. 지루함을 기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지루함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문장은 그때 비로소 시작된다.